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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실패학'인가? '실패에서 배우는 기업 경영'-10] 실패 기업의 오판 <끝>

경쟁력 갖춰도 실패하는 기업, 왜 쓸데없는 위험 대비 과잉 투자하거나 새것 집착해 전통을 무시하다가 고배 실패의 교훈을 조직에 새겨둬야 한때 '기술의 닛산'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자동차 생산기술에 있어 닛산이 세계 최고라는 평가가 담긴 표현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닛산은 이러한 찬사가 유효했던 당시에 최고의 자동차 회사가 아니었으며 르노의 도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자동차의 선택 기준 중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에서 최고점을 받은 닛산이 최고 회사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첨단기술이 제품의 성능을 결정하고 그 성능이 소비자의 선택을 좌우해야 할 것 같은 현대사회에서 남다른 기술력으로 무장하고도 부진을 보이는 기업이 적지 않다. 심지어 기술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제품을 출시한 뒤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치고도 성공은커녕 실패에 이르는 사례 역시 드물지 않다. 탁월한 경쟁 역량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고배를 마시는 기업들은 몇 가지 공통된 속성이 있다. 기술이 좋다고 팔리는 것 아니다 자동차 업계에서 회자되는 경구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닛산은 좋은 차를 만들고 도요타는 팔릴 차를 만든다'. 여기서 닛산은 기술적 최적화에 초점을 맞춰 최고 성능의 차를 만드는 회사다. 반면 도요타는 기술 수준은 상대적으로 처지더라도(단 고객이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시장에서 팔리는 차를 만든다. 닛산이 자랑하는 최고 성능은 소비자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기술지향적 제품에 대한 집착은 대개 최고경영자가 엔지니어 출신인 경우에 많이 발견되는 실수다. 기술적 우위 요소를 확보하는 데 집중하는 과정에서 시장의 요구는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 경영자 또는 회사의 목표에 부합하는 완성도를 가진 제품이 만들어질 수는 있지만 이것이 반드시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장의 수요와 괴리된 제품이 나올 수도 있다. 1990년 출시된 소니의 MD 역시 당시 대세였던 CD를 기술적으로 능가하는 최고의 제품이었다. 완벽한 음질과 재생 능력 풍부한 데이터 저장 능력 등 CD와 비교가 안 될 기능을 갖췄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결국 MP3에 왕좌를 내주고 말았다. 실패의 근본 원인은 고객의 수요에 걸맞은 시장 지향적 제품을 내놓지 못한 데 있었다. '무해 냉매' 개발 다우케미컬 실패한 이유 세계적인 화학회사인 다우케미컬은 1990년대에 새로운 냉동기 냉매(Dowtherm 209)를 선보였다. 냉매가 외부로 새어 나와도 인체에 해가 없도록 만들어진 이 제품은 냉매 유출에 따른 위험이라는 기존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선풍적인 인기를 끌 것이라는 사내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기대는 출시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실제 기존의 냉동기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냉매가 유출될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했다. 더구나 신제품의 가격은 기존 제품의 두 배에 달했다. 결과적으로 회사는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연구비를 투자한 셈이다. 힘들여 제품 개발에 성공했지만 냉매가 새나올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고객들은 새로운 발명품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껍질 벗긴 땅콩 내놨지만 고객 외면 아무리 새것이 좋다고 해도 지켜야 할 전통이 있다.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담고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음료시장의 대표적 라이벌인 코카콜라와 펩시는 한때 고정관념을 깬 새로운 발상으로 기존의 판을 뒤집으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공 들여 출시한 이들의 야심작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유는 고객의 인식 속에 자리 잡은 전통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부동의 최고 브랜드로 군림해 온 코카콜라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펩시의 노력은 집요했다. 코카콜라로 대표되는 콜라 맛에 익숙한 기존 시장 확대를 포기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신세대를 공략해 1위로 올라서겠다는 것이 전략의 핵심이었다. 이 같은 구상을 토대로 펩시는 1970년대 시작한 펩시 챌린지(눈을 가리고 펩시와 코카콜라를 맛보게 한 뒤 선호도를 테스트하는 이벤트)를 확대하고 마이클 잭슨을 이용한 공격적 마케팅을 펼쳤다. 펩시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코카콜라는 85년 '뉴코크'를 출시했다. 콜라 특유의 톡 쏘는 맛을 줄이고 단맛을 늘린 뉴코크는 디자인에 대한 평가가 고무적이었을 뿐 아니라 사전 시음 결과도 좋았다. 그러나 고객의 반응은 냉담했다. 출시 3개월 만에 뉴코크는 사라졌으며 다시 원조 코카콜라가 판매대에 올랐다. 새로운 콜라가 맛은 좋았을지 모르나 오랜 세월 코카콜라에 담겨 있던 전통적인 이미지가 고객에게는 새로운 맛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93년 '수퍼보울' 광고로 유명한 펩시의 '크리스털 펩시' 역시 마찬가지 운명을 맞았다. 투명한 빛깔의 콜라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센세이션에 불과했다. 콜라는 적갈색이라는 전통과 고정 관념에 익숙함을 넘어 친근감을 느끼고 있던 대다수 소비자에게 펩시의 신제품은 정통을 벗어난 이단아일 뿐 더 이상 콜라가 아니었다. 미국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면 선수나 관중이 껍질이 있는 땅콩을 먹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사실 땅콩 껍질을 벗기는 것은 수고스럽기도 하고 주위가 껍질로 지저분해진다는 불편함이 있다. 일찍이 이 문제를 간파한 한 회사가 껍질을 제거한 땅콩 판매에 나섰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매출은 급감했고 고객의 원성은 커졌다. 결국 판매 4개월 만에 껍질을 벗긴 땅콩은 자취를 감췄다. 야구장에서 고객이 원한 것은 땅콩 껍질의 유무가 아니었다. 150년이 넘는 프로야구 역사와 함께한 문화를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달러 동전은 1달러 지폐 대체 못 해 얼마 전 미국에서는 1달러 지폐를 대체하려는 취지에서 1달러짜리 동전이 선보였다. 그 이면에는 이를 통해 연간 5000만 달러를 절감하려는 관계 당국의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동전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에도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다. 주된 이유는 이 동전이 25센트 동전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새 동전에서 과거의 1달러 지폐보다 좋은 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공을 누리기는 어렵다. 실패 사례를 모두 공부하고 자기 것으로 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실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이고 실패 과정을 조직에 내재화하는 것이다. 미래의 지속적 성장을 원하는 기업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다. 그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안이함이 더 무섭다. 기업을 갉아먹는 진정한 적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사안일이며 때 이른 포기다. 조기훈 상무 딜로이트안진

2010-08-05

[왜 '실패학'인가?-실패에서 배우는 기업 경영] 월마트

2006년 5월 월마트는 한국 진출 9년 만에 모든 영업권을 이마트에 매각하고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이 선정하는 미국 500대 기업 순위에서 매출 기준으로 1~2위를 다투는 세계 최대 유통 공룡이 한국에서 고배를 마신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월마트 재벌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빠져나오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미국 재계와 월마트의 시각을 전했다. 이 신문은 월마트의 한국 철수가 산업 전반에 걸쳐 소수의 재벌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많은 글로벌 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월마트와 까르푸 등 글로벌 강자들이 한국 시장에서 각각 4위와 5위에 그친 것은 재벌과의 커넥션으로 유.무형의 이점을 안고 있는 토종 업체들과 불공정한 경쟁을 벌인 결과라는 분석도 곁들였다. 즉 월마트의 영업 방식 등 기업 내부에서가 아니라 재벌 지배라는 외부적 요인에서 실패 원인을 찾은 것이다. 과연 월마트의 철수를 불합리한 경쟁 상황 때문만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외부 여건이 이 회사에 유리하지 않았던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게 전부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월마트가 한국 소비자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철수에 앞서 조 해트필드 월마트 아시아 사장은 "시장 확장을 위해 직원들과 함께 소비자들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시장이 우리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소비자에게 다가가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다. 월마트가 한국 시장에 진출한 1998년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하에 있던 시기다. 월마트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 때를 최적의 진입 시점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먼저 경기침체로 시장에 진입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인수합병(M&A) 대상이 존재할 것으로 봤을 것이다. 또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한국 소비자들이 월마트의 슬로건이자 핵심 전략인 'EDLP(Everyday Low Price)'에 매료될 것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실제로 월마트는 당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네덜란드계 할인점인 마크로의 4개 매장을 인수하며 최초 진입에 필요한 거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의 글로벌 스탠더드 전략을 한국 시장에 접목시키는 데서 난관에 직면한다. 월마트는 고객이 무엇을 원하느냐 보다는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 미국.캐나다 등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 사례에 기반해 한국 소비자 또한 자신들의 글로벌 정책에 길들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파국은 여기서 비롯됐다. 월마트는 한국 소비자가 '비합리적' 소비자임을 간파하지 못했다. 이는 이마트의 사례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사업 초기 월마트를 모방했지만 곧 한국 대형 할인점의 틀을 정립한 이마트는 한국 소비자의 식문화와 쇼핑문화에 기반한 독특한 모델을 창출해냈다. 대형 할인점은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도심에 위치하면서 백화점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인식시키는 전략이 먹혀들었다. 월마트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가격 만족을 위해 질 낮은 서비스와 도심 밖 원거리 이동 등의 불편을 감수하도록 소비자를 길들이려는 기존 전략을 고수했다. 그러나 가격과 서비스의 반비례 관계를 인정하는 서구의 '합리적' 소비자와 한국의 '비합리적' 소비자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가격.서비스.편의 모두의 만족을 원하는 한국적 성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패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월마트는 또 자신들만의 브랜드 정체성(BI.Brand Identity)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흔히 월마트의 실패 원인으로 꼽히는 매장 내 신선 식품 부족이나 불편한 매장 구성보다 더 큰 실책은 자신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독특함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월마트는 가격 관리에 집중한 나머지 한국 내 조달이 가능한 제품 중심으로 상품을 구성해 한국 할인점과의 차별화가 부족했다. 월마트의 명성을 듣고 먼 길을 나선 고객에게 그에 상응하는 특별함을 제공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고객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반면 같은 외국계 할인점인 코스트코는 한국 할인점이 갖추지 못한 독특한 상품과 컨셉트를 앞세워 선전했다. 매장의 외관은 물론 화장실 변기까지도 미국 현지 모습을 그대로 구현함으로써 고객이 미국에서 쇼핑하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유도했다. 월마트의 감점 요인이었던 창고형 매장 구조도 코스트코에서는 불편함이 아닌 특별함으로 작용했다. 결국 월마트가 추구했던 '매장 형태와 서비스의 글로벌화'와 '상품 구성의 현지화'는 한국 시장에서 외국 기업도 한국 기업도 아닌 어정쩡한 이미지를 낳았다. 자신만의 브랜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결과는 소비자의 외면이었다. 마지막으로 월마트는 한국 시장 진입을 지나치게 서둘렀다. 진출 초기 월마트는 상표권 분쟁에 휘말려 월마트 대신 '한국마크로' 상호를 1년간 사용해야 했다. 신규 시장 진입자로서 브랜드를 알려야 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셈이다. 상표권 사용에 따른 문제 발생 가능성에 대한 조사조차도 완벽히 끝내지 않을 만큼 성급하게 시장에 진입한 것은 이후 진행될 불행의 전주곡이었다. 고객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월마트만의 이미지를 수립하지 못했던 것도 조급한 결정의 부산물이었다. 모리타 아키오 소니 회장은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을 혼합하는 기업 경영 원리를 언급하면서 '글로벌 로컬리제이션(global localization)'을 줄여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는 환경에서 사고와 전략은 글로벌하게 행동과 운영은 로컬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월마트는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이미지와 선진화된 시스템을 과신한 나머지 한국 시장에서의 '글로컬리제이션'에 실패한 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다. 해외로 영역을 넓히는 단계에서는 그간 성장기반이 돼온 기업 고유의 기준 외에도 글로벌 스탠더드와 지역화(localization)의 경계를 연계시킨 글로컬리제이션을 제대로 정립하고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 작업이 말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고수하는 원칙과 함께 각각의 지역 특성에 맞춰 정책과 프로세스를 수정하고 재무.회계 조직 정보기술(IT) 인프라까지 재정비하는 대규모의 투자와 시간이 요구된다. 월마트는 어쩌면 한국 시장이 이 같은 투자를 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한국에서의 실패가 그저 그만한 작은 실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외 진출을 준비하는 많은 한국 기업의 입장에서 그들의 실패는 글로컬리제이션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면서 필승 전략을 수립하는 데 꼭 필요한 처방일 수 있다. 이준연 이사 딜로이트컨설팅

2010-07-22

[왜 '실패학'인가?-'실패에서 배우는 기업 경영'] 미국 자동차 빅3

환경친화적 차 생산개발 외면…포드·GM·크라이슬러 몰락 자초 코카콜라, 그린 정책으로 브랜드 1위…녹색 경영은 기업가치 높이는 게 핵심 경영 전반에 걸쳐 친환경 요소를 도입한 이른바 '녹색경영'이 대세다. 많은 기업이 탄소 규제에 대응해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고 환경친화적인 제품을 개발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다. 녹색경영은 업종과 국경을 초월해 거의 전 산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추세다. 일반의 오해와 달리 이 거대한 흐름은 단순히 환경친화 제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녹색'이라는 요소가 조직 전체에 흡수되고 내부화돼 하나의 조직문화로 자리 잡아야 하는 데 있다. 기업의 녹색혁신은 녹색의 시각에서 경영 전반을 조명하는 데서 시작된다. 빌 포드 주니어는 1999년 포드 회장에 취임하면서 20억 달러를 들여 미시건주 디어본에 있는 공장 재건축에 착수했다. 3만 평에 달하는 자동차 공장의 지붕을 잔디로 덮었다. 잔디 지붕은 새들을 불러모았고 빗물을 정화했다. 보온효과를 높여 공장의 냉.난방비도 크게 줄었다. 잔디 지붕은 포드의 환경친화적인 기업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도 도움을 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뿐이었다. 환경 측면에서 볼 때 자동차산업은 제품 제조단계보다는 운영단계에서 발생하는 대기오염 등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문제가 핵심 이슈다. 그러나 잔디지붕이 상징하듯 포드는 환경전략의 초점을 제조과정에 맞췄다. 자동차 운행과정에서 유발되는 더 심각한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으며 이것이 포드의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반면 도요타는 자동차 운행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하이브리드카 개발에 주력했다. 그 결과 97년 하이브리드카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일찌감치 이 부문 세계 시장을 선점했다. 올해 전기배터리와 내연기관을 병행해 사용하는 전기자동차를 출시하는 등 2020년까지 전 모델을 하이브리드화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내놓았다. 미국 자동차 업계의 '빅3'는 여전히 위태롭다. 한때 세계시장을 좌지우지하던 이들이 좌초된 것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경제위기에 취약한 제품 포트폴리오에 따른 필연적인 매출 감소와 '유산비용(복지비용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쟁 미망인이나 유자녀 등에 대한 지원비용에서 유래)' 등 과다한 복지지출로 대표되는 고비용 구조 금융위기로 인한 유동성 위기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거인의 몰락은 팔릴 만한 차를 만들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자동차 연비 및 배기가스 배출량 규제 등 각국 정부의 규제 강화 흐름에 맞춰 유럽연합(EU)과 일본의 자동차업계가 '그린카' 개발에 매진하는 동안 GM 등은 다른 생각을 했다. 픽업트럭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등 에너지 다소비 차종이 많이 팔린 종전 미국시장의 구조에 안주해 변화의 물결을 외면했다. 이 같은 안일이 결국 참담한 결과를 불러 왔다.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최근호에서 "빅3의 수십 년에 걸친 전략적 의사결정 착오가 파국을 몰고 왔다"며 "이들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60년대 이미 몰락은 시작됐다"고 진단했다. 이들이 지난날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사이 경쟁업체들은 치밀하게 반전을 준비했다. 도요타와 혼다는 기후변화 및 화석연료 고갈에 따른 범세계적 규제 흐름에 대응해 친환경 그린카 개발 및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강력한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하이브리드카와 전기차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독일 자동차 업체인 BMW는 액화수소를 직접 주입해 운행하는 수소연료자동차(Hydrogen7)를 개발해 시험운행 중에 있다. 일반적으로 비즈니스 의사결정 상황에서는 여러 선택지 사이에 '트레이드오프(trade-off)' 관계가 성립한다.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면 다른 목표의 달성이 늦어지거나 희생되기도 한다. 문제는 녹색경영의 주요 요소들이 이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장된다는 데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많은 경영현장에서 탄소배출량이나 에너지효율과 같은 녹색경영의 주요 요소들은 가격과 품질 등 전통적 가치에 밀려 희생되곤 했다. 그러나 이미 도래한 녹색경제는 기업에 중대한 태도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빅3의 좌초는 전략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녹색을 등한시한 기업에 어떤 미래가 닥칠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브랜드 마케팅에 녹색을 통합 제품의 환경친화성이나 기업의 녹색경영 정도는 해당 기업의 평판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랜 세월 세계적 명망을 유지해온 기업이라도 녹색 이슈로 순식간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대로 확고하고 일관된 녹색전략은 기업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구원 투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글로벌 브랜드 가치 1위에 오르는 코카콜라는 환경 등 사회적 책임 이슈와 관련해 자주 거론되는 기업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도 등 해외 현지공장에서 무분별하게 지하수를 쓰는 바람에 주민들의 농업용수가 고갈되고 사막화 현상을 유발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또 공장에서 방출한 폐수에 식수가 오염되고 콜라 찌꺼기에서 독성물질이 배출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일각의 비난에 대해 코카콜라는 브랜드 관리 차원에서 적극 대응에 나섰다. 제품생산 과정에서 소비한 물의 양만큼을 자연에 되돌려 주겠다는 '물 중립(water-neutral)'을 선언하고 친환경 기업으로의 이미지 전환을 모색했다. 선언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기술혁신과 비용이 요구됐지만 문제 해결을 향한 발상의 전환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코카콜라 외에도 많은 기업이 적극적인 그린 전략을 천명하고 있다. 프록터앤드갬블(P&G)은 최근 발표한 경영계획에서 향후 5년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한 제품으로 20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에너지 및 물 소비량을 10% 줄이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역시 녹색경영 방침을 선포하고 녹색경영과 친환경제품 개발을 위해 5조4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사회분위기를 감안할 때 녹색과 연계한 브랜드 마케팅은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다. 주주와 종업원은 물론 투자자.규제기관 궁극적으로는 소비자들에게 기업의 활동을 알려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부정적 사안이 발생했을 때 명확하고 호소력 있는 커뮤니케이션은 필수적이다. 효과적인 소통 전략의 부재는 때로 치명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고조되는 비판 여론을 잠재우는 데 실패할 경우 브랜드 가치에 금이 가거나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볼 수도 있다. 강동호 딜로이트안진 이사

2010-07-15

[왜 '실패학'인가?-'실패에서 배우는 기업 경영'-7] 소니 MD

기술·시장 변곡점서 기업 판도 변화…소니, 진공관→트랜지스터 시대 도약 디지털 시대에 MD 주력하다 뒤처져…애플은 네트워크 주력, 아이팟 성공 기업의 판도 변화는 기술과 시장의 변곡점에서 일어난다. 소니는 1950년대 초반 전자제품의 기반 기술이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이전하는 변곡점에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워크맨과 콤팩트 디스크(CD)로 이어지는 혁신을 주도하면서 아날로그 시대에 세계 음향가전 시장의 절대 지존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소니의 성공신화는 디지털 혁명의 풍랑을 만나면서 좌초했다. 하드웨어의 시장 지배력을 소프트웨어 분야로 확장-결합시키려는 전략 방향은 타당했지만 하드-소프트 융합시대의 주연 자리를 애플에 내주고 조연으로 전락했다. 소니의 실패는 20세기 아날로그 사고방식의 연장선에서 21세기 디지털 혁명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소니가 50년대에 싸구려 소형 라디오로 미국 시장에 진출했을 때 소니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소니는 불과 5년 만에 미국의 트랜지스터 소형 라디오 시장을 평정하고 이어 60년대엔 독자 개발한 브라운관을 내세워 컬러TV 시장까지 석권했다. 80년대 워크맨 신화를 만들었고 83년 필립스와 공동 개발한 CD는 기존의 LP(레코드)판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며 음향 매체의 표준으로 올라섰다. 80년대 소니는 혁신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면서 음향-영상 분야 하드웨어에서 세계 1위를 굳혔다. 소니는 이후 '하드와 소프트를 결합해서 승부하자'는 전략을 내세웠다. 88년 CBS음반사를 매입하였고 89년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하면서 가전회사가 아니라 글로벌 미디어-디바이스 기업으로 면모를 갖췄다. 91년 소니는 미니 디스크(MD) 포맷을 발표하며 차세대 미디어 시장의 지배력 확보에 나섰다. MD는 당시 시장을 주도하던 CD를 압도하는 장점이 있었다. 우선 MD는 크기가 CD의 절반 이하였다. CD 자체의 크기 때문에 휴대용 CD 플레이어의 소형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MD는 워크맨의 절반 크기로 휴대용 플레이어를 만들 수 있었다. 결정적 우위는 녹음 기능이 있다는 점이었다. CD 수준의 높은 음질에 카세트의 녹음 기능이 결합되고 크기도 작은 MD는 차세대 미디어로서 손색이 없었다. MD는 제조자에게도 매력적이었다. CD 플레이어와 호환성은 없었지만 기존의 CD 제조 공장에서도 낮은 원가로 쉽게 생산할 수 있었다. 공(空) MD 1개의 가격은 3달러에 불과했다. MD플레이어를 시장에 안착시키는 필수조건인 MD 음원 확보에서도 소니의 역량은 세계 최고였다. 세계 5대 음반사를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는 소니는 MD플레이어 출시와 동시에 MD 음반을 발매할 수 있었다. MD의 출시로 CD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하고 소니의 MD플레이어가 디지털 음악시대의 워크맨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했다. 90년대 세계 음향-영상산업의 지존이었던 소니의 브랜드 파워 마케팅 능력에 MD의 기술적 우위까지 결합된 MD의 앞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시장에선 다른 일이 일어났다. 출시 후 10년이 지난 2000년까지 MD의 세계 판매량은 1400만 대에 그쳤다. 이 중 800만 대가 일본에서 팔렸다. MD는 근본적으로 아날로그 시대의 제품 개념인 '스탠드 얼론(Stand Alone)' 기기였다. 휴대하기 편하고 녹음도 할 수 있지만 네트워크 개념이 없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고성능 컴퓨터의 보급과 광대역 인터넷의 확산은 음악산업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CD에서 디지털 신호로 변환된 음악 신호는 MP3 포맷이라는 파일 형태로 표준화되면서 음악을 스테레오 앰프로 듣던 아버지 세대와 달리 신세대는 컴퓨터로 듣기 시작했다. 광대역 인터넷의 보급으로 음악 파일의 컴퓨터 간 교환이 가능해지고 휴대용 MP3플레이어가 출시됐다. 음악의 주요 소비층인 신세대에게 음악 듣기는 파일 재생이지 더 이상 음향 기기의 작동이 아니었다. MP3플레이어 시장은 급성장해고 음악시장은 디지털 음악의 네트워크 교환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맞아 급격히 재편됐다. 애플은 바로 이 시점에 등장했다. 2001년 10월 애플은 소형 하드디스크를 적용한 MP3플레이어인 아이팟을 출시해 애플 특유의 산뜻한 디자인으로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하드웨어 시장 진입에 성공한 애플은 소프트웨어 시장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당시 CD 형태로 음반가게를 통해 유통되었던 음반산업은 냅스터와 같은 파일 교환 웹사이트를 통한 불법 MP3 파일 교환이 시작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디지털 음악의 저작권 문제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계속되면서 합법적 유통의 필요성은 커졌지만 실제 사업모델로 연결시켜 성공하는 회사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플은 2003년 4월 '아이튠스 뮤직스토어'라는 온라인 음악유통 사업에 승부수를 던졌다. 한 곡당 99센트 한 번 내려받으면 5대의 PC에서 애플 제품인 아이팟에서는 무한정 재생되었다. 애플은 음반사에 저작권료 지불을 보장했다. 아이튠스는 서비스 시작 후 15개월 만인 2004년 7월 13일에 1억 곡 2010년 2월까지 100억 곡이 판매되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아이튠스가 뜨면서 아이팟 판매가 급증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됐다. 아이팟은 2010년 3월 누적판매량 2억5000만 대를 기록했다. 애플 아이팟-아이튠스의 성공과 반비례해서 소니의 MD는 시장에서 퇴출되는 비운을 맞았다. 소니의 야심작 MD의 실패는 미래를 내다보는 근본적 혁신이 아니라 과거 성공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제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50년대 트랜지스터라는 첨단기술을 적용한 혁신제품 개발로 등장한 소니였지만 시야가 아날로그 시대에 머무르는 바람에 디지털 혁명의 본질을 놓쳤다. 그 결과 세계음악 산업의 지존 자리를 애플에 내주고 말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해서 미래형 사업구조를 만들겠다던 소니의 기본 관점은 타당했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은 소니가 생각했던 구시대식이 아니라 애플의 네트워크 대응 MP3플레이어와 온라인 음악 유통을 결합하는 데서 생겨났다. 애플의 하드웨어 제품 라인이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애플 매킨토시로 확장되면서 소프트웨어 서비스 라인인 아이튠스.앱스토어와의 연계에서 발생하는 시장 장악력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소니의 실패 경험은 타산지석이다. 아무리 강력한 시장지배자라도 기술-시장 변화의 변곡점에 대응할 수 있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에 실패하면 순식간에 추락할 수 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정보기술(IT) 산업은 디지털 혁명이라는 변곡점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해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과거 성공이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과거를 부정하는 미래형 혁신만이 21세기 기업의 살 길이란 게 소니의 교훈이다. 김경준 부사장 딜로이트컨설팅

2010-06-24

[실패에서 배우는 기업 경영]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

최고 인터넷기업과 미디어기업의 결합 합병 발표일 나스닥 지수 일일 최대폭↑ 10년 통합실험 실패…작년말 완전 결별 2000년 벽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메리칸 온라인(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은 21세기 최대 이벤트로 일컬어질 만한 사건이었다. 세계 최고 인터넷 기업과 초대형 미디어 기업의 결합이라는 상징성에 165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인수 금액이 가미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지금과는 다르게 업종 간 장벽이 상대적으로 두터웠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각각의 업종을 대표하는 이종기업 간 합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눈길이 쏠릴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먼저 합병의 필요성에 눈뜬 쪽은 AOL이었다. 1985년 전화선을 이용한 사용량 기반의 온라인 서비스업으로 출발한 AOL은 성공적인 기업공개(IPO)를 거치며 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그러나 이후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 사이에 가격경쟁이 심화되면서 정액제를 도입했으나 가입자 수 증가에 반해 이익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난관에 직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팝업광고.배너광고 및 스폰서와의 제휴 등 광고 기반의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을 꾀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9년에 들어서면서 인터넷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기 시작했다. 이는 회사의 근본적인 수익모델에 대한 뼈아픈 일격이었다. 네트제로가 무료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앞세워 2000만명의 회원을 모집한 것을 필두로 알타비스타.프리인터넷닷컴 등이 공짜 대열에 합류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AOL이 택한 것은 플랫폼 기반의 서비스 제공업체에서 콘텐트 기반의 서비스 업체로의 변신이었다. 또한 타임워너가 보유한 케이블 통신망은 AOL의 부족한 1%를 채워줄 수 있는 솔깃한 대안이기도 했다. 타임워너 입장에서도 AOL의 존재는 매력적이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뉴스와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던 타임워너는 AOL의 인프라가 탐났다. 마침 인터넷 기반 TV 네트워크를 목표로 1999년 새롭게 발족시킨 엔터테인돔닷컴(Entertaindom.com)이 폭주하는 사용자 접속을 감당하지 못해 삐걱대면서 안정적인 통신망에 대한 갈증은 더해갔다. 또한 수년째 자사의 주가가 답보 상태에 빠져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한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IBM이나 맥도날드.펩시코보다도 높은 시장가치를 인정받았던 AOL은 탐낼 만한 파트너였다. 인수합병 제의는 AOL 측에서 먼저 이뤄졌다. AOL은 우호적 인수합병(M&A) 형태를 유지하면서 유가증권 교환에 의한 인수 방식을 제안했다. 2000년 1월 합병 발표 초기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스닥지수는 하루 상승폭으로는 최대치인 167포인트 상승했고 타임워너의 주가는 하루에 40% 가까이 치솟기도 했다. 양사의 합병은 TV와 컴퓨터(PC).전화를 이용한 새로운 정보서비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합병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돼 이듬해 1월 인수금액 기준으로 사상 최대 거래가 공식 승인됐다. 그러나 불행의 씨앗은 합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터넷 사업에 대한 거품 논란이 끝이지 않는 가운데 인터넷 기업들의 주가 대비 실질 수익을 검증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잘나가던 나스닥은 상승세가 꺾이면서 2000년 3월을 정점으로 하락 추세로 반전하게 됐고 인터넷 버블은 급속도로 꺼지기 시작했다. 이후의 행보는 알려진 대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양사가 꿈꿨던 온.오프라인 통합 미디어 사업이 구호에 그치면서 합병 전 상대적으로 높은 순익을 기록하던 두 회사는 합병 후 만성 적자에 시달리게 됐다. 2004년에 처음으로 반짝 순익을 실현했으나 당초 목표로 했던 사업적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마침내 결별 수순에 들어가게 됐다. 지난해 12월 AOL이 분리 독립해 뉴욕증권거래소에 재 상장하면서 양사의 밀월은 막을 내렸다. 합병 당시 1600억 달러에 달했던 AOL의 시가총액은 재상장 후 30억 달러로 추락했다. 세기의 결혼이 파국으로 치달은 사태는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양사 간 통합의 실패다. 합병 당시 타임워너의 최고경영자(CEO)인 제리 레빈이 합병회사의 CEO를 맡았으나 회사 내 고위직은 대부분 AOL 임직원들이 차지했다. 요직을 꿰찬 AOL 출신 경영진이 타임워너의 사업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조직 장악에 실패하면서 조직 내 반목이 깊어졌다. 주요 경영진 사이에서도 혼선과 갈등이 빈번해졌고 이는 조직의 전체적인 역량 저하로 이어졌다. 단적으로 AOL의 성장 지향 경영 방식은 안정과 전통을 중시하는 타임워너 출신 경영진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제였다. 마찰을 해소하고 진정한 통합을 이뤄내려는 노력은 오간 데 없고 분열과 대립이 횡행했다. 이러한 난맥상은 근본적으로 합병 이후에 대비하는 준비 및 사후관리 부족에 기인한 바가 크다. 양사 모두 서로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M&A를 성공시키기 위한 협상에만 신경을 집중했을 뿐 정작 통합 이후 단계에서 수행해야 하는 액션 플랜에는 미온적이었다. 서류상의 결합과 단기적 이익에 매달린 나머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기업의 자원.지식.업무방식을 일관성 있게 합쳐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역량을 쏟지 못한 것이다. 물리적 결합을 뛰어넘어 화학적 통합으로 가기 위한 이른바 'PMI(Post Merger Integration 인수합병 후 통합)'를 등한시했던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통합을 위한 원칙이나 방향이 일부 존재했지만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은 미흡한 수준이었다. 또 다른 불씨는 시장 상황과 사업 전망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부족했던 데서 비롯됐다. 합병을 고려할 시점에 AOL의 입장에서는 이미 확보된 고객에게 타임워너의 고급 콘텐트를 제공한다는 큰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시장의 현황과 인프라를 무시한 발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AOL 회원 대다수가 전화접속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데이터 용량이 큰 멀티미디어 콘텐트를 제공하는 데는 애초부터 물리적 한계가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고급 스포츠카를 탈 수 있다고 선전하고 손님을 기다린 꼴이다. 통합 시너지에 대한 냉철한 검토보다는 과대 포장된 이상론에 휩싸여 현실의 문제를 간과한 것이 결국 오판으로 이어진 것이다. AOL은 이후에도 비현실적인 목표에 대한 공약을 남발해 주주들의 의구심을 키웠으며 결국 인터넷 거품 붕괴와 맞물려 급전직하하는 비운을 맞게 됐다. 박상진 전무 딜로이트컨설팅

2010-05-20

['실패에서 배우는 기업'] 리먼 브라더스의 몰락, 속이고 숨기고…투자은행이 기본을 버렸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저금리에 기초한 과잉 유동성과 이에 따른 자산 버블 현상이 주된 배경이었다. 수익을 위해서라면 상식마저 저버리는 월가의 지나친 탐욕과 함께 고도로 발달된 금융기법을 규제와 감독 시스템이 미처 따라가지 못한 제도상의 허점 또한 사태를 심화시킨 요인으로 거론된다. 위기를 수면으로 떠올린 것은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보호신청이었다. 리먼은 당시 세계 4위의 투자은행으로 시가총액이 300억 달러를 넘나들던 거인이었다. 글로벌 금융기관으로의 도약을 꿈꾸던 많은 은행이 배우고자 했던 역할모델이기도 했다. 이러한 리먼의 파산보호신청은 국제 금융시장에 엄청난 충격파를 안겼다. 리먼의 파산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차입을 통해 과도한 위험에 투자하는 비즈니스모델의 근본적 한계에서부터 감독기관의 규제 실패 등이 우선적으로 도마에 오른다. 아울러 어려운 재무상황이 주주 및 채권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결정과 대차대조표 조정(manipulation) 등의 잘못된 관행도 지적되고 있다. 리먼을 비롯한 투자은행들의 비즈니스모델은 대개 차입을 통해 조달한 자금을 위험이 큰 상품에 투자하는 형태였다. 고수익을 목표로 리스크를 감수하는 이러한 사업방식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장의 신뢰가 절대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차입의 구조와 규모가 정상을 벗어난 데 있다. 위기 직전까지 리먼은 700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었지만 자기자본은 250억 달러에 불과했다. 또한 투자자산이 장기로 운용되는 데 반해 자금조달은 환매조건부증권매매시장(Repo)의 단기 거래에 의존했다. 매일 수백억에서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Repo를 통해 끌어와야 하는 상황에서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잃어 기존 대출금의 만기연장이 거절되거나 신규 대출이 중단된다면 자금조달 창구가 막혀버리는 난점이 존재했다. 지나친 성장우선주의도 화가 됐다. 리먼은 2006년 성장우선 전략을 채택한 뒤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위험이 증가하고 있을 시점에 더욱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영토 확장에 나선 것은 중대한 오판이었다. 리먼은 경쟁자들이 리스크 회피를 위해 움츠릴 때가 시장 장악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투자처 발굴과 유동화를 통한 매매 업무보다는 고위험.고수익 자산에 대한 직접투자 방식으로 사업 방향을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제값에 팔리지 못한 금융자산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상업용 부동산 및 구조화된 대출자산에 대한 투자가 크게 늘었다. 브레이크 없는 투자에 대한 경고등이 도처에서 울리고 있었지만 이를 제어하는 안전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 최고경영진은 내부적으로 설정한 위험관리 규정이나 투자 한도에서 벗어난 투자를 용인하는 등 사실상 일탈을 방조했다. 투자 한도는 계속 높아져 간 반면 위험관리 시스템의 기능은 날로 약화돼갔다. 2008년 3월 다른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의 부도가 기정사실화되자 리먼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처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가시적인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외적으로 약점을 가리고 미봉책으로 연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사업 지속을 위해 자금 차입이 필요했던 리먼은 신용평가회사들로부터 우수한 등급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신용평가사들이 중시하는 현금유동성과 레버리지(자기자본 대비 차입 규모) 수치를 개선해야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2008년 2분기에 리먼은 28억 달러의 분기손실을 발표했다. 1994년 상장 이후 최초의 손실이었다. 당장 시장에 미칠 충격을 줄이기 위해 레버리지 비율을 낮추는 것이 시급했다. 차입금 비중을 줄이기 위해 보유자산 매각에 나섰으나 문제가 생겼다. 당시 시장상황으로는 리먼이 공정가치로 장부에 기록한 금액보다 낮은 금액으로 자산을 처분해야 했다. 시장은 리먼의 공정가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만약 보유자산 매각으로 손실이 발생할 경우 자기자본이 줄어들 뿐 아니라 유사한 자산에 대한 평가손실이 추가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이 대목에서 리먼이 선택한 대안이 이른바 'Repo 105'로 불리는 회계적 기법이었다. Repo 105란 일종의 환매조건부채권 매매로 현금 100달러를 빌리면서 채권 105달러를 담보로 제공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일반적으로 환매조건부증권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경우 회계상으로는 증권을 담보로 한 차입으로 처리하지만 리먼은 이를 매각으로 처리했다. 결과적으로 리먼은 이를 통해 2007년 말과 2008년 1.2분기 말에 각각 386억 달러 490억 달러 500억 달러의 차입금을 줄였다. 이 과정에서 매각회계처리에 필요한 변호사의 의견(True Sale)을 미국에서 얻을 수 없었던 리먼은 자사의 유럽법인으로 증권을 이관한 뒤 Repo 거래를 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Repo 105를 이용해 차입금을 줄인 사실을 규제기관과 신용평가회사 투자자는 물론 이사회에도 공시 또는 보고하지 않았던 점이다. 매각으로 처리된 증권은 수일 내에 리먼이 다시 환매수했다. 리먼은 또한 재무제표에 계상된 현금성 자산 중 상당 부분을 현금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적절히 공시하지 않았다. 2008년 9월 10일까지도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400억 달러에 달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상 즉각 현금화할 수 있는 금액은 20억 달러에 불과했다. 리먼의 몰락에는 미국식 투자은행 시스템에 공통으로 내재한 여러 문제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금융위기 발생 후 정부의 대대적 지원이라는 변수가 따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금융기관이 살아남은 데 반해 유독 리먼을 포함한 일부 은행만이 붕괴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을 망각한 데 있다. 먼저 과도한 레버리지를 들 수 있다. 레버리지는 이익을 증대시키는 유용한 수단일 수 있지만 경기침체기에는 손실을 급증시키는 독이 된다. 레버리지가 10인 경우 부채로 조달해 투자한 사업에서 10%만 손실이 발생해도 자기자본이 모두 잠식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과거의 호시절처럼 주기적인 자산가격 재상승이나 즉각적인 경기 호전을 기대할 수 없는 시기에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위기 때는 과감한 자산매각 등을 통해 레버리지를 줄이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리스크 관리 역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사전에 정해 놓은 규정이나 투자한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리스크 관리 부서는 경영진 혹은 타부서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한다. 리먼은 외견상 그럴듯한 내부견제장치와 통제장치를 갖추고 있었지만 실패한 기업이 그렇듯 운영은 허술했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정보 공유와 회계 처리를 꼽을 수 있다.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골라 이를 맹신하다 보면 왜곡된 정보에 기초한 그릇된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 밖에 없으며 그 결과는 대개 치명적이다. 기업 내ㆍ외부에 주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회계처리가 투명하지 못하면 이해관계자 전반의 신뢰를 잃게 된다. 이는 종국에 가서는 기업 붕괴로 이어진다. 한때 잘나가던 엔론의 몰락을 부른 결정적 원인은 회계부정이었다. 이길호 전무 딜로이트안진

2010-05-13

[왜 '실패학'인가? '실패에서 배우는 기업 경영'] 노키아와 에릭슨의 엇갈린 위기 대응

필립스 반도체 공장서            에릭슨, 별다른 조치 안 취해 2000년 화재 났을 때              그해 25억 달러 적자 기록 노키아는 전 부서 알려 대응           신속 대응 안한 대가 치러 강자들이 즐비한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기업은 핀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노키아다. 2000년 30.6%였던 세계시장 점유율은 이후 꾸준히 늘었고 현재에도 30%대 후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반면 발트해 바로 건너편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소니에릭슨의 운명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이 회사의 전신인 에릭슨은 2000년까지만 해도 10% 이상의 점유율로 모토로라와 함께 노키아를 추격했지만 이후 급전직하하고 있다. 지난해 시장 점유율은 5%로 10년 전에 비해 반 토막 수준이다. 한때 경쟁구도를 형성했던 두 회사의 위치가 크게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한 사건에 대한 대처방식의 차이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태의 발단은 2000년 3월 뉴멕시코 사막에 위치한 필립스 반도체공장의 화재였다. 갑작스러운 번개로 일어난 화재는 10분 만에 진화됐지만 반도체 공정의 가장 중요한 클린룸과 웨이퍼가 진화 과정에서 오염된 데다 연기가 전체 시설로 퍼져 피해가 커졌다. 화재 직후 필립스는 이 공장의 반도체부품을 공급받는 노키아에 일주일간의 조업 중단이 예상된다는 내용을 통보했다. 당시만 해도 이 화재가 중대한 비상사태로 비화할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뚜렷한 근거는 보이지 않았지만 노키아는 추이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즉시 문제의 부품을 특별관리 품목에 올리고 전 부서에 이 사실을 알렸다. 위기관리부서가 중심이 돼 대응체제를 갖춘 상태에서 필립스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상황을 점검했다. 일부의 우려대로 화재 발생 2주일 후에야 필립스는 생산공정을 정상화하는 데 몇 개월이 더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키아는 즉시 전 세계 필립스 공장의 생산 여력을 모두 노키아에 집중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 같은 적극적이고 발빠른 대응은 즉각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불이 난 공장의 부품을 사용하고 있던 에릭슨도 사고 발생 후 노키아와 비슷한 시점에 필립스로부터 같은 내용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에릭슨의 담당자는 일주일만 지나면 사태가 해결될 것으로 보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특별히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으며 화재로 비롯될 충격과 파장에 대해 깊이 조사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글로벌 공급망 체계에서 단기간의 수급 지연은 흔히 있는 일이니 문제가 불거지면 그때 가서 다른 공급처를 알아봐도 될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었다. 수주일이 지난 후에야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파악한 에릭슨의 경영진은 필립스로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필립스의 모든 생산 여력이 노키아에 투하됐기 때문에 에릭슨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다른 반도체 공급처 역시 노키아가 이미 동원 가능한 설비를 모두 장악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에릭슨은 안이한 늑장 대처로 '플랜B'를 가질 수 없었다. 2000년 한 해만 휴대전화 사업부문에서 25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에릭슨은 2001년 세계시장 점유율이 6.7%로 전년도의 10%에서 급격히 하락했다. 휴대전화 생산 전면 중단 등의 비상조치를 취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한 끝에 결국 소니와 지분을 절반씩 나눠 '소니에릭슨'으로 간판을 바꿔 다는 길을 택했다. 위기에 몰린 에릭슨에 비해 반사이익을 톡톡히 챙긴 것은 노키아였다. 필립스 공장의 화재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태와 그 결과는 기업의 위기관리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견 작은 문제나 충격이라도 발생 시점에서 재빨리 내용을 감지해 조직 전체에 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의 '내부화'는 위기관리의 출발점이자 관건이다. 사실 노키아와 에릭슨이 필립스로부터 받은 경보는 비교적 낮은 수준의 위기단계로 빠른 시일 내에 회복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담당자 입장에서는 대응태세를 결정하기 어려웠다. 두 회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초기 대응에 나섰고 그 결과는 판이했다. 유연성과 탄력성 역시 위기 대응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충격에서 회복할 수 있는 탄력성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위기관리의 요체다.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협력업체 유통.물류업체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기업이 직면하는 충격의 종류와 원인은 셀 수 없이 많다. 생산라인이 멈출 수 있는 직접적 원인은 비단 공장 내부에서뿐 아니라 납품업체 공장이나 운송시스템 통신과 정보시스템 등 어느 쪽에서든지 생길 수 있다. 위의 화재 사태에서 노키아는 문제를 감지하는 순간 곧바로 주요 담당자로 구성된 위기대응 태스크포스(TF)를 조직하고 대체부품 공급 채널과 내부 잉여자원을 미리 확보해 놓는 등 효율적인 대응태세를 가동했다. 1999년 대만 지진으로 야기된 반도체 공급 차질에 대한 델과 애플의 대응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규모 7.6의 강진으로 전기 공급이 중단되면서 컴퓨터 칩으로 쓰일 반도체 웨이퍼가 모두 못쓰게 됐다. 소수의 공급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점을 미리 간파했던 델은 이미 오래전부터 물류부문 혁신에 주력해 단기간의 주문-생산-출하 사이클을 운영하면서 특정 모델이나 가격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을 확보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신제품 개발에만 몰두했던 애플은 소수 부품공급업체와의 장기공급계약에 매달린 나머지 지진으로 인한 부품조달 차질을 메울 만한 대체 공급원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회사의 사활을 걸고 야심차게 준비해 온 노트북인 아이북(iBook)을 제때 고객에게 제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애플이 시장을 잃은 반면 델은 그해 3분기 순익을 전년 대비 41%나 높이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도처에 위험이 널린 세상이다. 어디서 지뢰가 터지고 어디서 암초가 돌출할지 예측하기 힘들다. 위기의 파장 또한 거대 기업의 명운을 좌우할 만큼 그 강도와 깊이가 심화되는 추세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고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을 예측하며 위험을 관리하는 대응능력의 확보 여부가 기업의 생사를 가름하는 중대 변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종기 이사〈딜로이트안진>

2010-05-06

['실패에서 배우는 기업 경영'] 글로벌 이동통신서비스 '이리듐'의 몰락

1989년 시작한 최초의 범세계 위성휴대통신 사업 10년 준비기간동안 로밍서비스 등 통신환경 급변 시작 1년만에 94억달러 날리고 2500만달러에 매각 이리듐(iridium)이라는 희귀 원소가 있다. 원자번호 77번인 이 금속은 공룡의 멸종 원인에 관한 논쟁에서 자주 거론된다. 전 세계적으로 공룡 화석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지층에 지각보다 30배 많은 이리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리듐은 운석이나 화산 폭발 지역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그래서 거대한 운석의 충돌이나 대규모 화산 폭발 같은 천재지변 때문에 공룡이 멸종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공룡 멸종 이후 수만 년이 지난 1999년 이리듐이라는 이름은 또 다른 공룡 몰락의 드라마에 다시 등장한다. 비운의 글로벌 위성전화 서비스인 '이리듐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이리듐은 780㎞ 상공의 저궤도에 쏘아 올린 통신위성들을 이용해 전 세계를 하나의 통화권으로 묶는 최초의 범세계 위성휴대통신(GMPCS.Global Mobile Personal Communication by Satellite) 서비스다. 이리듐이라는 사업 명칭은 당초 쏘아 올릴 계획이던 77개의 위성 숫자(실제 발사된 위성 수는 총 72개)와 이리듐의 원자번호(77)가 일치하는 데서 착안했다. 새로운 위성통신 시대의 도래를 알렸던 이 첨단사업은 1989년 미국의 모토로라를 주축으로 하는 이리듐사(Iridium LLC)에 일본.러시아.대만.중국.한국 등 세계 47개 주요 통신기업들이 가세하면서 시작됐다. 총 50억 달러가 넘는 사업비가 투자된 초대형 글로벌 프로젝트다. 이동통신 서비스 시장에 거대 공룡이 등장한 셈이다. 이리듐의 가장 큰 장점은 말 그대로 전 세계 어디에서라도 휴대 단말기를 통해 음성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보편적인 아날로그 셀룰러(무선전화) 방식의 통신망으로는 꿈도 꾸기 어려운 독보적인 경쟁 우위 요인이었다. 또한 기존 고위도 위성통신과는 달리 파라볼라 안테나 등 복잡하고 무거운 부수 장비가 필요 없었다. 운송 수단이나 도로 같은 인프라를 갖추기 어려운 오지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존 위성통신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극지방 통화 불능 현상도 극복할 수 있었다. 적어도 성능 면에서는 확실히 진보된 기술을 기반으로 한 첨단 이동통신 서비스가 분명했다. 이 때문에 모토로라는 먼저 위성망이 구축돼야 한다는 작지 않은 부담에도 이리듐 서비스의 기술적 우위와 이에 기반한 상업적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출범 전부터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지만 98년 11월 서비스가 시작된 후 실가입자 수는 5만명 수준에서 정체됐다. 채무 부담이 가중됐고 결국 이리듐사는 재정적 위기에 몰리게 됐다. 그 결과 서비스 개시 후 채 1년이 안 된 99년 8월 44억 달러 상당의 부채를 갚지 못하고 자발적 파산을 신청했다. 이후 2001년 보잉사에 단돈 2500만 달러에 매각됐다. 총 94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손실을 입고 이리듐 서비스는 마치 그 옛날 공룡의 운명과 흡사한 모습으로 지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리듐의 충격적인 실패는 모토로라는 물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통신기업에 적잖은 손실을 안겼다. 그러나 실패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참여 기업들은 모토로라의 신사업 독점을 막기 위해 또는 경쟁 체제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씻기 위해 불확실한 길에 뛰어들었다. 사업 타당성과 성공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에 기초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은 뒷전이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모토로라에 있다. 사실 이리듐은 사업 구상 초기부터 적지 않은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토로라는 애써 이를 간과했다. 이 회사는 87년 이리듐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 검토에 착수한 후 타당성 분석을 거쳐 89년 사업 추진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시장성 논란이 제기됐다. 기술 주도권이 디지털 셀룰러 방식으로 넘어갈 것이 명백한 이동통신 서비스 산업의 흐름을 감안할 때 과연 이리듐이라는 신규 서비스가 얼마만큼 시장에서 먹힐 수 있는지에 대해 냉철하고 전략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그러나 모토로라는 시장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예측을 외면하고 낙관적으로 포장된 전망만을 좇아 사업 추진을 결정했다. 사업 진행 속도도 문제였다. 투자 결정 시점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야 실제 서비스가 시작됐다. 이미 시장 상황은 사업 추진 초기와는 다르게 변해 있었다. 이리듐 개발에 착수할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는 고가품이었다. 이리듐도 비싸기는 했지만 그 효용성을 감안하면 휴대전화와 비교해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디지털 휴대전화와 PCS 서비스가 순식간에 아날로그 시장을 대체했다. 기존 지상 기지국을 이용해 글로벌 음성통화가 가능한 로밍 서비스가 등장했다. 게다가 사용 기간 약정에 따른 무료 단말기와 저렴한 요금제에 익숙해진 소비자에게 대당 3200달러나 하는 이리듐 전용 단말기 가격은 큰 부담이었다. 분당 4~7달러에 이르는 사용 요금은 납득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크게 보면 이리듐 몰락의 원인은 사업 계획에 대한 과대 평가와 대체 기술에 대한 과소 평가의 결과로 요약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는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 시티폰(CT-2)이 그렇다. 무선호출기 시장의 급성장에 취해 그 미래를 과신한 일부 사업자들이 호출기와의 상호 보완성이라는 이점에 주목해 시티폰 서비스를 도입했다. 그러나 디지털 기반의 PCS 시장이 이미 열린 상태에서 통화 품질도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데다 발신 전용이라는 사용상의 제약까지 있는 '반쪽짜리' 단말기가 설 자리는 없었다. 게다가 시티폰은 과거에 유사 서비스가 영국.프랑스.대만 등에서 이미 실패한 적 있다는 점은 무시했다. 시티폰은 2000억원에 달하는 투자 비용을 고스란히 날렸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이동통신 서비스에 집중했어야 할 기회 비용까지 이중으로 잃게 하는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며 역사에서 사라졌다. 21세기 산업 환경은 끊임없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어떻게 시장이 변화하는지 면밀하게 분석하지 않고 판단을 내렸다가는 즉각적으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과거의 화려한 성공은 과거일 뿐이다. 현실과 미래의 변화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해 의사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일등 기업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수만 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도 50억 달러를 투자한 글로벌 초대형 프로젝트 이리듐도 지금은 지구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기업들은 미래를 주시하고 변화에 적극 대응해 경쟁력을 키워야 하겠다. 정수환 딜로이트컨설팅 이사

2010-04-08

'실패에서 배우는 기업 경영', 세계적 자동차 기업은 왜 무너졌는가

도요타, '규모'에만 과도하게 집착하다 스스로 발목 GM, 세계 1위 '승자의 오만' 취해 복지혜택 펑펑 미쓰비시, 유리한 부분만 보는 '현실부정의 덫'에 자멸 역사적으로 강국의 몰락은 외침보다는 내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강자일수록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더 파괴적이다. 실패학으로 유명한 잭디시 세스 에머리대 교수는 “성공기업이 쇠퇴하는 원인은 기업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말한다. 기업이 성장하면 기업의 근본을 갉아먹는 ‘자기 파괴 습관’이 무의식 중에 생겨나는데 이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내부 요인은 ▶현실 부정 ▶오만 ▶타성 ▶핵심역량에 대한 과도한 의존 ▶눈앞의 경쟁만 보는 근시안 ▶규모에 대한 집착 ▶조직원의 사일로(silo·곡식을 저장하는 원통형 창고를 뜻하지만 경영학에서는 조직 안에 성이나 담을 쌓고 다른 부서와 협력하고 소통하기를 꺼리는 부서를 비유적으로 표현) 의식으로 요약된다. 한때 세계자동차 산업의 선두권을 달렸던 GM.도요타.미쓰비시가 경험한 뼈아픈 실패도 내부 요인에서 비롯됐다. 1970년대 오일쇼크는 소형차 시장의 급성장을 가져오면서 변방의 일본을 세계자동차 시장의 중심부로 진입시켰다. 도요타는 극한적 원가절감을 추구하는 '가이젠' 신화를 바탕으로 2008년 부동의 1위였던 GM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자동차 회사에 올랐다. 거칠 것 없이 질주하던 도요타는 채 3년이 되지 못해 급제동이 걸렸다. 최근 불거진 리콜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1937년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번 리콜은 차량 품질에 대한 문제 제기 수준을 넘어서 회사가 결함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무시.은폐해 왔다는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도요타 성공 신화의 한 축이었던 '가이젠'은 스스로 발목을 잡는 덫이 돼버렸다. 도요타는 90년대부터 세계 1위를 목표로 해외 생산을 급속히 확대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2004년 672만 대이던 판매대수는 2008년 891만 대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양적 팽창'을 '질적 안정'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문제가 누적됐다. 원가절감을 위해 과거 일본기업에서 조달하던 부품을 전 세계로 확대했다. 부품의 공통사용 비율이 높아지면서 일부 부품 불량이 전 차종 불량으로 확산할 수 있는 위험성은 더욱 커졌다. 해외공장을 관리할 직원이 부족해지자 간부를 파견하던 곳에 풋내기를 내보내는 사례도 생겼다. 도요타 특유의 치밀한 관리에도 허점이 생긴 것이다. 이는 결국 품질 문제로 비화됐다. 1000만 대를 웃도는 이번 리콜 대상 차종 대부분이 2004년 이후 생산됐다. 5년 이상 누적된 문제가 이제야 수면으로 떠올랐다는 걸 보여준다. 글로벌 양산 체제 구축과 안전-품질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세계 1위를 추구했던 도요타는 자신을 정상으로 끌어올린 '규모에 대한 집착'이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패착이 되는 역설에 직면하게 됐다. 더욱이 도요타 특유의 폐쇄적인 기업문화는 인화단결과 내부혁신에서는 강점을 발휘했지만 외부 고객의 불만을 경청하고 신속히 문제를 해결하도록 책임지는 위기관리에서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앞서 도요타에 1위를 빼앗긴 GM도 내부 요인에 의해 쇠락했다. 1920년대부터 세계자동차 시장의 절대강자로 군림해온 GM은 전성기 때 미국 시장 점유율이 57%에 달했다.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은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GM은 그러나 2009년 6월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GM 몰락의 핵심 원인은 '승자의 오만'이었다. GM은 세계최고라는 자부심에 취해 영원히 정상을 고수할 것으로 착각했다. 기술개발.품질혁신.원가절감 등 기업 본연의 문제에 천착하기보다는 커지는 내부갈등을 방만한 경영과 무분별한 사내복지의 형태로 봉합해 왔다. GM은 미국 자동차산업의 대호황기였던 50년대를 거치면서 퇴직 후의 생활과 의료까지 보장하는 복지제도의 골격을 완성했다. 이후 GM은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가 아니라 '제너러스 모터스(Generous Motors)'라고 불릴 정도로 종업원들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부여했다. 당시 성장산업인 자동차 산업에서 1위였던 GM은 이런 부담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미국인의 평균수명이 1900년대 초 50세 전후에서 20세기 후반 77세로 늘었다. 퇴직 종업원의 생존기간이 길어지면서 연금지급액은 급증했고 의료기술 발달에 따른 의료비 지출 증가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고령화의 유탄을 맞은 GM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지탱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 돼버렸고 18만 명의 종업원들은 자신이 아니라 퇴직자의 연금을 위해 일하는 꼴이 됐다. 2000년대 초반 회사가 부담하는 의료보험료와 연금 비용은 자동차 한 대당 2200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려 판매 부진으로 이어졌고 판매 촉진을 위해 할인 판매를 감수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GM의 몰락은 이러한 과다한 '유산 비용(Legacy Cost)'에서 비롯됐다. 호황기에 얻어지는 과실을 미래투자에 돌리기보다는 현재에 나눠 먹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했고 이는 결국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부담이 됐다. 객관적 시각을 잃을 때도 위기는 찾아온다. 1990년대 SUV시장의 팽창에 힘입어 급부상했던 미쓰비시 자동차는 호시절의 환영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바라보는 '현실부정' 증세로 자멸했다. 미쓰비시 자동차는 2000년 6월 제품 결함을 조직적으로 은폐해 온 사실이 발각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2년 미쓰비시-푸조가 생산한 트럭의 클러치 결함으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실을 숨기려다 경영진 7명이 구속됐다. 이후 소비자 신뢰에 치명타를 입고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미쓰비시 자동차는 결국 독자생존을 포기하고 2009년 프랑스 푸조에 인수됐다. 20세기 후반까지 50년간 세계 민간항공기 시장의 1위를 지켜온 보잉은 2001년 수주 기준으로 에어버스에 뒤처지는 위기를 맞았다. 구원투수로 투입된 신임 최고경영자(CEO) 해리 스톤사이퍼는 '보잉의 적은 바로 보잉 자신'이라고 선언하고 근본적 혁신을 통해 경쟁력 회복의 기반을 닦았다. 1등 기업인 도요타 GM 역시 진정한 적은 경쟁기업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한국기업도 LCD.반도체.TV.조선.휴대전화 등의 분야에서 속속 세계 1위로 올라서고 있다. 정상으로 발돋움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겠지만 앞으로 정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도전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성공기업의 '자기파괴' 증세에 빠지지 말고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내부혁신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도요타.GM.미쓰비시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사장

201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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